[인터뷰 데뷔 프롤로그]


엄마를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우리 엄마는 항상 그저 '엄마'였어요.
이제는 엄마가 아닌
하정림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안녕하세요.

인터뷰 '데뷔'를 기획한

스타트업 데카르트의 팀원,

고현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왔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하정림씨,

나의 엄마입니다.


엄마를 묘사해 보라는 요청을 받으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희생이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엄마라는 호칭 뒤로

직업, 꿈, 그리고 이름을 묻어버린 사람.

나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소망했습니다.


'엄마가 아닌, 고현진맘 하정림이 아닌,

그냥 하정림으로서 살아가기를'


그 즈음부터였습니다.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아닌

그저 사람이 궁금했습니다.


엄마 하정림이 아닌,

하정림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데뷔'란

'첫 걸음'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나를 향하여,

제 2의 인생을 향하여

첫 걸음을 떼는 5060들에게


용기와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당신만의 삶이라는 무대 위

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데카르트 팀원

고현진 올림.



[인터뷰 데뷔 vol.01]

10년 경단녀,

약국에 취업해 수백 종류의 

약을 외우기까지


"제가 약사도 아닌데

약국에 취업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처음에는 하기 싫은 일이었어요."


그녀는 어쩌다 약국에 취업하게 되었을까?


"엄마 하정림으로서 포기했던 것은

'꿈꾸는 것 자체'였어요."


엄마로서 살아가기 위해

꿈꾸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는

나의 엄마, 하정림.


"내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스스로 희생을 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체 어떻게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던

엄마로서의 삶이

희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녀의 딸로서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한 적 있나요?"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Ep.01

엄마, 하정림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52세, 두 딸을 둔 엄마, 하정림입니다. 입시 학원의 과학 선생님이었다가, 남편과 함께 일식/한식/중식/분식/야식 음식점을 운영했다가, 현재 약국 사무원으로 재취업한지 1년 차가 되었습니다."


-과학 선생님, 음식점 운영, 약국 사무원이라.. 흔히 볼 수 없는 경력인 것 같은데요. 궁금한 점이 많지만 이에 대한 질문은 뒤로 잠시 미뤄두겠습니다. 내 인생에 우선순위를 매겨본다면?


"1순위는 가족, 2순위는 가족, 3순위는 나. 


가족 테두리에 속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이 저에게는 1순위예요. 그 사람들이 잘되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가장 큰 행복이기도 해요. 동시에 제가 잘 살아왔다는 지표이기도 하고요."


-우선순위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길 텐데요. 엄마로서 살기 위해 포기한 것이 있나요?


"꿈을 포기했죠. 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꿈꾸는 것 자체'를 포기했어요. 대신 하루 24시간 1분 1초를 전부 애들로 채웠으니까요. 애들의 시간이 곧 나의 시간이었죠."


-하정림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엄마 하정림과 그냥 하정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을 못 하겠어요. 그 둘을 분리할 수가 없어요. 나의 모습을 너무 죽여서 '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죽였다'라는 사실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아요. 엄마가 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애들한테 최선을 다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저에게는 딸 2명이 있는데 그 애들의 성취가 온전히 저의 성취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희생이라는 단어는 저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엄마로서 애들을 키웠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하정림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었어요. 제가 선택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나'를 죽여 엄마로 살아가야 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하정림씨.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인터뷰어이기 이전에, 하정림의 딸로서 가장 묻고 싶던 말이 있었다.


-자식을 낳은 걸 후회한 적이 있나요?


"후회한 적 없어요. 이미 낳았는데 어떻게 후회해. (장난스럽게 웃었다가 이윽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농담이고, 정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궁금해졌다. 자식을 낳고 한 가정의 엄마가 되기 전의 하정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Ep.02

잊고 살았던 스무 살의 나


-젊은 시절 하정림의 꿈은 뭐였나요?


"10대 때는 꿈이 있었는데 20대부터는 꿈이 없었던 것 같아요. 10대에는 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하지만 대학에 떨어지며 의사의 꿈을 접어야 했고, 그 이후로는 별다른 꿈 없이 저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그저 살아냈던 것 같아요."


-특정 직업이 아니어도, 그 시절의 하정림이 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있나요?


"괜찮은 직장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랐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소망을 적극적으로 성취해 내려는 의지나 액션이 부족했어요. 한창 열정으로 들끓어야 할 20대를 날려보낸 거죠."


-20대를 그저 흘려보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원동력이 없었어요. 내 인생을 잘 가꾸고, 나다운 삶을 살겠다는 내적, 외적 원동력이 부족했어요. 온전히 내 삶을 만들어 나갔어야 했는데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탓도 있는 것 같고요."

-비록 원동력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것은 있었을 텐데요. 20대 하정림의 인생에 있어 우선순위가 궁금합니다.


1순위가 사랑. 2순위가 예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어요. 결국  둘 다 이루긴 했네요.

-지금의 하정림에게 있어 1순위는 가족, 20대 하정림의 1순위는 사랑이었네요. 어떻게 보면 서로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마치 SF 소설처럼 20대의 하정림이 시간을 넘어, 50대가 된 지금의 하정림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것 같나요?


"아쉬움은 있지만, 열심히 살아냈구나. 고생했어. 50대라고 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정림을 찾아가.


-라고 말할 것 같아요. 이 질문을 들으니까 갑자기 50대 20대라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 것 같네요. 지금의 제가 20대의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80대의 하정림이 지금의 저에게 그대로 하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부터라도 3순위에 있던 나를 1순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p.03

52살 하정림


- 지금까지 젊은 날의 하정림을 추억해 보았는데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옛날 생각을 하다가 지금 내 모습을 다시 마주하니 후회되는 것이 있나요? 있다면 무엇인가요?


"입시에 실패했던 고3 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만 더 도전해 보고 싶어요. 만약 그랬다면 결과랑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다시 도전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을 통해 많이 성장했을 거예요. 온전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거잖아요.


실패든 성공이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애들한테도 항상 '뭐든 해라'라고 이야기해요. 결과와 무관하게 노력한 과정에서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더라고요. 그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0%부터 100%까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정도를 평가해 본다면?


"데카르트는 참 퍼센트를 중요하게 여기는군요. 게임할 때도 매번 상위 95%, 74%.. 그런 결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던데.. (웃음)"


[편집자 주: 앱 <데카르트>는 두뇌게임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두뇌게임 결과가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하는지 수치화하여 보여준다.]


지금은 60%라고 할게요. 그중 40%는 딸들이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사실 덕분에 채워졌어요. 나머지 20%는 비록 제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어도 나이 50이 되어 온전히 내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점 덕분이에요."


-원하지 않던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1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중식, 일식, 분식, 야식 등 다양한 음식점을 운영했었어요. 주말이나 빨간날에도 쉬지 않고 계속 일했고, 그 과정에서 살도 10kg 정도 빠졌어요. 오랜만에 저를 만난 사람들은 매번 '뼈밖에 안 남았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가게 사정이 어려워져 가게를 접고 난 뒤 정말 막막했어요. 10년 전 끊긴 과학선생님으로서의 경력은 유명무실해졌고, 단순한 알바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약사인 친척으로부터 약국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여러 번 거절했어요. 상상도 못했던 분야였고, 수많은 약의 이름이나 위치를 외울 자신도 없었어요. 저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일이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두렵다는 이유로 평생 알바만 하거나, 주부로 살기는 싫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벌써 1년 차네요."


-요즘은 어떤가요? 적응을 마치셨나요?


"처음 몇 달은 적응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심지어 잘 때도 일을 하는 꿈을 꿀 정도로 많이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제가 약국에서 일하다 보니까 한 번만 실수를 해도 큰일이 나거든요.


딸들이 말해줬는데 '약..한 박스..재고 안 맞아..!' 제가 항상 이런 식의 잠꼬대를 했대요. (웃음) 그 정도로 적응기에는 직장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온다는 각오로 임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집에 오면 기절하듯 잠들고요. 


요즘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굉장히 뿌듯하기도 하고, 적응도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아요. 이제 웬만한 약은 다 알아들어요. 약국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약 이름을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 가장 힘들게 했어요.


예를 들어.. '엔스틸룸폼'이라는 약이 있어요. 손님들은 계속 몰려오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약사님이 '엔스틸룸폼 하나 꺼내주세요' 다급하게 말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졌어요. 바쁜 와중에 '무슨 폼이라고요..?' 묻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지금 하고 있는 약국 일 이외에 다른 도전을 해볼 생각도 있나요?


"원래 지금 내 나이에 새로운 꿈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는 없었어요. 그런데 큰 딸이 굉장히 보채요. '나이 50은 숫자에 불과하다', '엄마 또래들 중에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등등..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확실히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머리가 안 따라줘요. 그래서 데카르트 앱을 깔아서..."


-(경청하다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며) ...!!! 갑자기 광고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박장대소하는 하정림)

-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해 보겠습니다. 나의 매력 포인트는?


"긍정적이에요. 그래서 사람의 단점을 잘 못 본다는 점도 어떻게 보면 장점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저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눈에 보여요. 어릴 때는 그런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실제로 몇 년 전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보기도 했어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으로라도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나 봐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 하고 싶다는 불꽃이 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 같아요."


-10년 후 하정림은 어떤 모습일까요?


"(웃으며 외친다) '나이스!' 


10년 후에는 훨씬 잘 살고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이런 자신감이 왜 생기는 걸까요? 이렇게 긍정적인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요즘 제 자신감이 회복되었나 봐요. 소소한 성취들을 해내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이대로 작은 만족들을 쌓고, 또 쌓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10년 뒤에는 아주 나이스하게 잘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보다 훨씬 더 즐겁게."


Outro


- 마지막 질문입니다. 하정림다움을 정의한다면?


"'아무튼'이라는 표현 어떨까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아무튼 나는 긍정적으로 나답게 살아갈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죠. 


아무튼, 하정림.

좋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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