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데뷔 vol.04]

광고대행사 퇴사 후 경단녀가 되어,

출판사에서 18년을 근무하기까지


책을 쓰는 일이란 꽃삽 하나를 들고 시베리아에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부커상을 받고 한 권의 책이 유명세를 떨치면 작가의 이름은 저절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 옆에서 묵묵히 꽃삽을 갈아주고, 작가의 손이 얼지 않게 온기를 나누어주고, 부르터진 손에 연고를 발라주는 이가 있다.


그 이름은 편집자.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데 관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왔다 갈까. 그럼에도 다시 삽을 쥐고, 꽝꽝 얼어버린 땅을 마침내 녹여, 어디에도 없던 왕국을 세우게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혹자는 ‘왜 그렇게 바삐 살아요?’ 질문받으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긴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했던 힘이 과연 의무감 하나뿐일까?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언제나 바삐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삶을 잠시 멈추고, 의무에 가려져 있던 동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p.01

책을 만드는 직책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18년 동안 은행나무 출판사에 다니며 총괄이사를 맡고 있는 이진희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출판사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편집자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오게 되었네요.


- 처음부터 출판사에서 일을 하지는 않으셨다고요?


원래는 현대제철 경리부와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다가 남편을 따라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4년 정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경단녀가 되어버린 거예요.


처음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독일어 과외를 하다가, 남편과 둘이서 정말 용감하게 출판사를 해보기로 했어요. 둘 다 출판사에서 일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판사를 덜컥 차린 거죠. 그 당시에 큰 딸이 4살, 작은 딸이 1살 될 무렵이었어요.


둘이서 딱 1년을 운영하니까 지인으로부터 투자 받은 돈이 완전히 0이 된 거예요. 당장 다음 달 생활비도 없었어요. 그래서 패물을 팔고, 부모님한테 지원을 받았어요. 면목이 없더라고요.

나라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가야겠다 싶어 무수한 회사에 지원을 했어요. 그때는 진짜 동아줄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죠. 왜냐하면 생계를 위해 월급을 받는 일이 꼭 필요했던 때였으니까요. 


그중 하나가 은행나무 출판사였어요. 그 당시 나이도 서른네 다섯 쯤이었고, 출판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닌데 사장님께서 좋게 봐주셨어요. 오히려 출판사에서만 몇 년을 일했던 사람보다 다양한 일을 경험해 본 사람이 사고가 열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편집자로 뽑혀 지금은 이사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네요.


- ‘편집자’라는 직업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나요?


작가를 발굴하고, 그 작가가 쓴 글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에요. 사실 책은 작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편집자는 계속 화장을 시켜주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똑같은 원고인데도 이 편집자한테 맡겼을 때 나오는 모습과 저 편집자한테 맡겼을 때 나오는 모습이 정말 달라요. 처음에는 엉망인 원고도 능력 있는 편집자의 손을 거치면 ‘아니 이 원고가 그 원고였어?’ 할 정도의 책으로 완성될 수 있어요. 


Ep.02

책 한 권을 낳기까지의 산통


- 정성을 들여 책을 만들어내더라도 모든 책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저희끼리는 ‘출산한다’고 해요. 편집자들은 모두 자신이 만드는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요. 내 애를 낳는 것만큼 정성 들여 가꾸고 예쁘게 만들어 세상에 내놨는데 그중 한 7-80%는 독자들이 그렇게 많이 좋아해 주진 않죠. 아니, 나온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은 독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죠. 왜 빨리 책 안 내주냐고 출판사에 전화하기도 해요. 그런데 대부분의 신인 작가는 그렇지 않잖아요. 어떤 책들은 나왔는지도 모르고 사장되는 경우도 많아요.


- 신인 작가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고충을 겪기도 하겠군요.


어떤 작가가 1년을 한 권의 책에 쏟아부었는데, 이 책이 결국 초판부수밖에 못 팔고 끝난다면, 그래서 연봉이 300만 원 정도라면 소설가라는 직업을 계속할 수 없죠. 지속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고 초판만 내고 끝내는 건 작가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독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7-80%의 책들에서 다른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해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자책도 만들고, 오디오북도 만들고, IP를 팔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책에서 충당하지 못한 수익을 작가에게 줄 수 있잖아요.


이런 건 출판사와 에이전시 없이 작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 일들을 계속 찾아 만들어주는 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책은 죽지 않아요. 내가 어떤 책을 좋다고 판단하기만 한다면, 저는 늘 언젠가는 이 책이 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해요. 너무 낙천적인 느낌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돌아올 뭔가가 있다는 점을 꼭 믿어요.

- 책을 낳는다고 하셨잖아요. 정성 들여 낳은 책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과 허망함을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사실 내 좌절보다 더 중요한 건 작가의 좌절이에요. 그래서 편집자가 작가의 감정을 잘 보듬어주는 게 필요해요. 


‘선생님, 여기서 초판은 이랬지만 우리가 이것도 할 거고 저것도 해보려고 해요.’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요.

 

‘내 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뭔가를 해주려고 하네?’ 이런 확신을 줘야 되는 거죠. 이번 작품을 마치고, 다음 작품도 쓸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게 편집자의 역할 중에 제일 중요해요. 그렇게 동력을 되찾은 작가가 계속 글을 쓰려는 의지를 보일 때, 그 모습을 보며 저의 좌절감 역시 해소돼요.

- 작가님들이 느끼는 중압감이 심한 편인가요?


작가님들이 그런 말을 해요.


‘오늘 뭐 했는지 아세요? 빈 화면 켜두고 첫 문장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루 종일 한 일이 그거예요.’


정유정 작가님도 그랬어요. 그냥 알래스카 허허벌판에 꽃삽을 들고 왕국을 건설하려는 느낌이래요.


게다가 혼자 하는 일이잖아요. 대중들 앞에 설 때는 내 독자가 이렇게 많구나 느끼다가도 방에 들어가 혼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온갖 나쁜 것만 보여요. 나한테 달린 악플, 나쁜 리뷰. 끊임없이 기분이 다운되고, 결국 ‘누가 알아봐 주기나 하겠어? 이 소설 완성 못할 것 같아.’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그럼 그 소설을 시작하고 끝낼 때까지 계속 정서적으로 지지를 해주는 거예요. 틈틈이 연락해서 ‘잘 진행되고 있네요.’ 격려도 하고 그냥 들어주기도 하고요. 끊임없이 연락을 하죠. 


- 편집자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가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거군요.


저는 이사여서 직원들에게도 그래야 하는 일이거든요. 직원들이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안 좋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있고, 팀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도 조정을 해주기도 하고요.


Ep.03


의무가무(義務歌舞)

생계를 위한 일,

그러나 즐거움을 곁들인


의무가무(義務歌舞)

생계를 위한 일, 그러나 즐거움을


- 일을 한다는 행위는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일종의 의무로 여겨지곤 합니다. ‘일하러 가기 싫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듯이요. 이사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누구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는 나이가 있는데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물며 전업주부인 지인도 이제 애들이 다 컸다고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로 일하러 나가요.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는데 온갖 일을 다한대요. 저희 출판사의 모든 팀이 하는 일을 걔는 혼자 다 하는 거죠. 아예 생소한 분야인데도 그 일을 하는 게 기쁘대요. 그전에는 집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일회용 티슈 받아와서 넣는 알바 같은 걸 하고 그랬어요. 그런 알바도 너무 자기한테는 소중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제 나이대 친구들을 만나면 어떤 일이든 해보려는 욕구들이 다 있어요.


한 친구는 얼마 전에 은퇴를 했어요. 완전히 일 중독자였고, 온몸을 불살라 일하고 장렬하게 은퇴를 한 거잖아요. 은퇴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또 나름대로 자기 일정을 짜서 도서관에 가 봉사활동을 하거나, 필라테스를 배우거나, 무슨 요일은 자기네 집에서 밥을 해줄 테니 점심을 와서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이만큼 나이가 들었는데도 계속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일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일하지 않고 쉬는 게 본인에게는 더 힘들고 불행하대요. 결국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를 불지를 수 있는 동력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이사님의 동력은 무엇이었길래 한 출판사에서 18년이나 근무할 수 있었나요? 


사실 일을 그만둔다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하다가 관두고, 생계를 위해 취업을 했다 보니 일을 쉰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선택지예요. 


대신, 기왕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즐겁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스스로한테 선물 같은 무언가를 계속 주면서 이 일을 계속 해왔어요. 


- 즐거움이 동력이 되었군요.


맞아요. 일을 할 때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요. 그 과정에서 제가 행운처럼 만난 분이 계세요. 정유정 작가님이요. 2009년에 처음 만났으니까 벌써 14년이 흘렀네요. 정유정 씨의 두 번째 책이 저희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이 해왔어요.


책을 쓸 때는 정신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까지 필요해요. 정유정 작가님의 <진이, 지니>라는 소설에는 보노보가 나와요.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보노보가 없어요. 그럼에도 실제로 보노보의 행태를 관찰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그걸 보러 같이 가죠.


어디에 보노보가 있는지 수소문하고, 동물학자와 연계해 일본에 있는 침팬지 연구소에 갔어요. 보노보를 보기 위해 일주일 동안 그 연구소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 그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감동을 받았어요. 그 연구소에는 전 세계에서 온 연구원들이 있었거든요. 아 연구라는 게 저런 거구나. 하면서요. 이렇게 정유정 씨 덕분에 제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할 순간을 엄청 많이 경험했어요.


예를 들어, 한겨울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 들어간다거나, 일본 홋카이도에 유빙을 보러 가기도 했고요. 폭설이 엄청 쏟아지는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10시간이 넘게 이동하고, 유빙을 보러 겨우 배를 타고 나갔어요. 


이런 일들은 저 혼자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고, 해보려는 생각조차 안 했던 것들인데 정유정 작가님 덕분에 경험했죠. 그래서 작가님한테 많이 감사하고요.


- 오래 몸담고 있는 회사라면 단순 직장을 넘어 각별함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사님에게 은행나무라는 출판사는 어떤 가치로 다가오나요?


작가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작가와 내가 함께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 것.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가 크고 있다는 느낌. 그런 동력이 한 해 한 해 쌓여 18년이 흘렀어요.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을 주는 곳이라는 점이 가장 큰 가치인 것 같아요.


Outro

이진희라는 이야기


- 이사님의 삶이 한 권의 책이라고 했을 때, 결말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를 바라시나요?


결말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좋은 결말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단계인 것 같아요. 남겨진 사람들에게 좋은 결말처럼 느껴질만한 마무리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남겨진 사람들이 ‘저 사람 인생 괜찮았어. 나쁘지 않아.' 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도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열심히 살았지’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어떤 큰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로 돌진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결국 좋은 결말에 이를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늘.


그래서 책을 낼 때도 당장의 결과보다는 이 책이 결국 세상에 퍼뜨릴 영향력을 믿는 거고, 그 책을 고른 나의 선택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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